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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이브리드 마케터가 된 이유 feat.마개이너

꼬마 사진작가, 개자이너를 거쳐 마개이너가 되다

나는 제너럴리스트를 넘어 볶짬탕리스트에 이르고 있는 마케터다. 호기심도 많고, 새로운 도구를 하나씩 손에 넣으며, 이전에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너무나 즐겁다. 미래에 대한 생각이 복잡할 땐, 과거에 어디서부터 어떤 계기로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 복기하는 편인데, 지금이 나에게 그런 순간인 것 같다. 그래서, 내 손에 들린 연장통에 연장들이 언제 어떻게 채워지게 됐는지 기억해보려고 한다.

첫 번째 점, 사진

10년 전, 학교를 자퇴하고 세상에 뛰어든 순간부터 나는 점을 연결하거나(connecting dots), 새로운 점을 만드는 (making new dods)삶을 살아왔다. 당시에 내가 가진 점은 두 개였다. 영어와 사진. 둘 다 좋은 시작점이었지만, 당장 돈을 만들어내는 건 사진이 더 빨랐기에, 그쪽을 먼저 선택했다.

웨딩, 졸업앨범, 스냅 보조 작가로 일했고, 평소엔 내 눈이 닿는 구석구석을 사진으로 남기기 시작했다. 꽤 괜찮은 사진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을 때, 블로그를 시작했다.

첫번째 플랫폼으로 선택한 네이버 블로그는 사용하기는 간편했지만, 사진의 색감과 화질을 뭉개버려서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티스토리로 넘어갔다. 그런데 여기도 문제가 있었다. 티스토리 블로그를 예쁘게 꾸미려면, 웹디자인을 알아야 했다. 그래서, HTML과 CSS를 조금씩 가지고 놀기 시작했고, 그럴싸한 사진 블로그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두번째 점, 디자인

그러다 디자인 회사의 인턴쉽 기회를 얻었고, 인쇄디자인을 배우게 됐다. 사진과 디자인은 퍽 닮아있었지만, 새롭게 배워야 할 것이 산더미였다. 타이포그래피의 기본부터, 그리드 정렬, 정보 전달을 위한 디자인 요소의 위계질서, 인쇄를 위한 디자인과, 클라이언트와의 대화까지. 학교에서였다면 몇 년이 걸렸을 주제들을, 실무를 통해 간단하게나마 배울 수 있었다.

사진에 디자인을 얹고 나니, 할 수 있는게 퍽 많아졌다. 디자인을 위해선 사진이 꼭 필요했고, 사진은 디자인 덕분에 날개를 달았달까. 이제는 카드뉴스, 엽서, 앨범같이 사진으로 시작해서 인쇄로 끝나는 일들도 할 수 있게 됐다. 그 즈음에, 4개월동안 6개 나라를 여행했다. 여행하는 나라에서 사진을 찍고, 엽서를 만들어 팔면서 말이다. 숙식은 호스텔에서 스탭으로 일하는 것으로 해결했다. 잠시 덮어두었던 영어가 새로운 점으로 빛났다. 여행 온 한국인들이 언어의 장벽을 느낄 때 통역도 해 주었고, 객실 사진도 새로 찍어주고, 주변 지도도 새로 디자인했다.

세번째 점, 영상

여행을 다녀온 이후에 카메라를 업그레이드할 기회가 생겼다. 거의 9년째 아직도 잘 쓰고 있는 5D Mark2다. 그런데, 이 새로운 녀석에는 전에 썼던 카메라엔 없던 기능이 있었다. 바로 동영상이었다. 여러가지 제약은 많았지만, DSLR렌즈가 만들어내는 특유의 공간감을 사진뿐만 아니라 영상에도 담아낼 수 있다는 건, 내겐 신세계였다. 그래서 영상을 찍기 시작했다. 스물한 살 때였다.

그때 나는 호텔에서 일하며 제주도에 살고 있었는데, 우연히 디지털 노마드 단체 해커 패러다이스가 제주도에 왔다. 제주 창조경제혁신센터 프로그램을 통해 그들의 Korean Buddy로 활동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이들이 제주도를 떠날 때쯤에 영상을 찍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여섯 명의 친구들을 인터뷰했다.

인생 첫 달러수입을 안겨 준, 소중한 영상이다:)

이 영상을 전달받은 리더 Dale은 나에게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인보이스를 보내달란 이야기를 했다. 나는 멋진 추억을 같이 만든 친구들을 위한 선물이라며 거절했지만, Dale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난생 처음으로 페이팔을 통해 달러를 받았고, 그 돈을 보태서 이들의 다음 여행지였던 발리 일정에 2주정도 합류했다.

도트 부스터, 영어

이야기의 시작은 사진으로 했지만, 사실 많은 순간에 내게 열쇠가 되어준 것은 영어였다. 나는 영어유치원을 다녔고, 언어에 재능도 있었다. 덕분에 아웃풋이 좋았다. 아쉽게도 한국에서 내내 공부했고, 국제중은 추첨에서 떨어지는 덕분에, 학창시절 내내 발음 굴리는 놈, 잘난척하는 놈이라는 꼬리표가 늘 따라다녔지만, 그 꼬리표가 사실은 꼬리에 달린 열쇠였다는 것을 사회에 나가서 똑똑히 알게 됐다.

제주도 게스트하우스 스탭으로 스무살을 시작하게 된 것도, 아무 연고도 없는 대만과 홍콩의 호스텔에서 무전여행 비슷한 것을 하던 나를 스탭으로 채용한 것도, 호텔 프론트에서 일하다가 싱가포르의 엘리트 사립 유치원 원장님을 만나, 학예회 사진작가로 싱가포르에 초청받은 것도 다 영어 덕분이었다.

유치원 학예회 사진, 이렇게 찍는 것을 본 적 있는가?

사실 영어는 그 자체로는 별 것 아니다. 혼자서는 큰 힘이 없다. 그러나, 영어는 다른 무언가와 결합했을 때 그 파급력을 지수승으로 올려주는, 엄청난 파워 멀티플라이어다. 영어덕분에 닿을 수 있었던 정보, 기회 그리고 사람이 지금의 나를 여기 있게 만들어줬다.

점프의 점, 마케팅

사진, 영상, 디자인을 휘휘 섞으면 무엇이 튀어나오냐면, 결국 마케팅이다. 특히 IT스타트업 붐이 일었던 2015년 전후로, 이 세 가지 점이 지니는 시장가치가 엄청나게 올라갔다. 스물 셋, 나는 첫 창업을 하고 디자인, 사진, 영상, 전시회 동시통역 등 여러가지 프로젝트를 맡으며 신나게 일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영어교육 앱 캐치잇잉글리시를 서비스하는 캐치잇플레이의 광고영상 제작을 맡게 됐다. 회사가 나를 선택한 이유는 단순했다. 이전에 작업했던 해커 패러다이스 인터뷰 영상이 마음에 들었다는 것이었다.

프로젝트를 맡게 된 나는 앱을 통한 영어학습 성공사례를 자랑하고싶은 유저를 모아달라고 이야기했다. 공모전의 형태로 진행됐고, 수백 건의 지원자 중 여섯 명이 선정됐다. 서울, 제주, 부산을 오가며 바쁘게 영상을 촬영했고, 그렇게 나온 광고영상은 히트를 쳤다. 이 성공을 바탕으로 캐치잇잉글리시에 마케터로 합류하게 되었고, 근무하던 2년여동안 매년 300%의 매출 성장을 만들었다.

지금의 점, 웹개발

10년 전, css를 수정해 배경색이나 폰트 크기 정도나 간신히 바꾸던 나는, 이제 홈 서버를 직접 운영하고, 우분투 VM을 통해 LAMP스택을 돌려서 웹페이지를 호스팅하는 마개이너가 되었다. 물론 개발직군에 취업할 만큼 많이 아는 건 아니지만, 워드프레스에 이런저런 기능 붙이고, 프론트엔드 디자인 얹어서 회사 홈페이지를 만들어내는 정도는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다. 지금 함께 일하고 있는 바이오 실험 자동화 스타트업 에이블랩스의 홈페이지도 그렇게 만들어졌다.

요즘엔 Vue.js를 공부하고 있는데, 로우데이터의 배열이 간단한 코드 몇 줄과 css를 통해 아름다운 웹페이지로 변하는 걸 보고는 엄청난 희열을 느끼고 있다. 뭐랄까, 예술뇌와 논리뇌가 손잡고 왈츠를 추는 기분이랄까.

마케터가 광고비를 들이지 않고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매체는 웹페이지다. 웹페이지는 트래픽을 발생시키며, Gtag와 Analytics를 통해 사용자 행동패턴을 파악할 수 있고, 리타게팅을 위한 데이터를 축적하거나, 전환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마케팅에 필요한 사진과 디자인을 만들어내고, 카피를 써놓은 뒤에, 그것을 웹페이지로 구현하는 것까지 배우고 나니, 정말이지, 할 수 있는게 무궁무진하다.

다음 점은 무엇일까, 새로 만들게 될까, 잇게 될까.

과거를 돌아 서두에 내게 던졌던 주제로 다시 돌아왔다. 내겐 새로운 도구를 손에 쥔 우연한 순간들이 있었고, 새 도구를 쥐게 되면 어김없이 그 도구가 빛을 낼 기회도 따라왔다. 마케터로 일한 지 5년째가 되었고, 그렇기에 많은 생각이 오고갔던 것 같다. 내가 정말 잘할 수 있을까? 더 잘 하려면 어떤 것을 해야 할까, 경로를 조금 꺾어봐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들이 오고가다, 이 문장을 쓰는 이 시점에 나름의 해답을 찾은 것 같다.

웹개발이라는 새 도구를 쥐었으니, 그 도구로 해결할 문제도 따라올 거라고.

또 10년쯤 지나 비슷한 글을 쓸 때엔, 이 순간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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